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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체육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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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목적 및 연혁


본 연맹은 빙상운동의 사계절시대가 열림과 함께 조직적인 단체활동을 통한 빙상운동의 저별확대로 생활체육 및 엘리트체육의 육성으로 지방체육 발전에 기여하고자 함.

빙상경기의 기원은 추운 북방의 원시인들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교통의 수단으로 개발한 도구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빙상은 육상이나 투기 등과 같이 인간의 생활속에서 필요에 의한 자연 발생적인 신체 활동이라 정의할 수 있다. 빙상의 역사는 여러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물의 형태와 그 자료를 분석, 검토하여 빙상의 발달과정을 추측할 수 있다.

러시아의 파닌에 따르면 석기시대 동굴속에서 발견된 유사 이전의 유물 중에 동물의 뼈로 만든 썰매 모양의 탐빙구가 발견되었는데 크기, 모양, 마멸된 바닥 등으로 보아 빙상에서 활주한 용구였음이 증명되었다. 또한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보관 중인 수골제를 끈으로 묶어서 신에 달게 되어있는 스케이트나 스칸디나비아의 원주민과 에스키모인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마골제 들의 스케이트에서 그 기원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스케이트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구미 여러 나라에서 각종 국제대회가 개최되고 각종 올림픽대회가 개최되어지기 시작한 19세기 이후이다. 우리나라에서 스케이트를 처음으로 구입한 사람은 현동순씨라고 하는데 그는 1908년 미국의 길렛트 씨로부터 경매장에서 구입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당시에는 스케이트를 구입하기 힘들었으므로 목판에 칼이나 철사 등을 붙이고 그 목판을 신 밑에 끈으로 달아서 스케이트의 한 형태로 놀이를 즐겼다. 이것은 스케이트가 아니라 빙상의 유희 및 오락의 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 후 1912년 경성일보사가 용산부근에 빙활장을 만들고 무료로 개방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스케이트장이다. 또한 1915년에는 중국의 빙상단을 초청하여 의주농업학교 부근의 경빙장에서 스케이트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최초의 국제빙상 경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스케이트가 국민에게 정상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 이후라 할 수 있다.

1921년 12월에 조선체육협회가 명동부근에 스케이트장을 만들어 개방함으로써 일반인의 스케이트에 대한 관심은 점차적으로 고조되어 갔으며 스케이트의 흥미 및 기술의 보급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1923년 대동강에서 시작된 전조선 빙상경기대회, 1935년에 한강에서 개최된 조선 여자 빙상 경기대회, 1933년의 전조선 중등학교 빙상대회 등 많은 대회가 해가 갈수록 많이 개최되었고 그 외에 전 일본 빙상대회가 여러 형태의 대회 이름으로 열리게 되었다. 그 중 상당수의 대회는 아시아 빙상대회로 불릴 만큼 그 규모가 방대하였으며 우리나라 선수들은 각종 대회에 참가하여 단체우승과 개인우승 등으로 그 명성을 떨쳤다.

1932-1938년까지는 우리나라 빙상계가 가장 전성기라 볼 수 있는데 이 당시에 일본과 경쟁하여 6년간이나 제패하는 큰 쾌거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 후, 1941년에는 한국의 편창남 선수가 19세의 어린 나이로 전일본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여 한국 빙상계를 놀라게 하였으며, 1943년에는 이효창 선수가 편창남 선수를 이어 전일본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기 전까지 한국인이 전일본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이성덕, 최용진, 김정연, 박윤철, 편창남, 이효창 등 6명이 무려 8회에 걸쳐 우승하여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한국빙상선수가 최초로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1936년 독일의 칼뮤슈에서 개최된 제4회 동계올림픽 대회인데 김정연, 이성덕, 장우식 선수가 참가하였다. 그러나 태극기를 달지 못하고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출전한 김정연 선수는 10,000m에서 18분 2초로 일본 신기록을 수립하면서 세계 12위를 차지하는 좋은 기록을 남겼다.

1948년 제5회 동계 올림픽이 스위스 산모르츠에서 개최되었는데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뜻 깊은 대회였다. 1956년 이태리, 코르티나 담배죠에서 거행된 올림픽은 김정순, 편창남 선수 등은 이 대회에 참가하여 한국 신기록을 갱신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며 새로운 한국빙상의 면모를 과시한 대회였다.

그 후, 1964년 제9회 인스부르크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최남연 선수의 등장은 장거리계에 있어서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게 된다. 최남연 선수는 무명선수로 제2부 선수권대회에서 종합우승을 하여 1년 사이에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제1부 선수권대회까지 종합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달성하였다.

그 당시 국내대회는 주로 한강철교 밑에서 거행되었는데 빙질도 양호한 편이었다. 1965년에는 제1회 한일 친선경기가 지금이 효창운동장에서 열렸으며, 1967년 2회 대회는 일본에서 개최하였다. 이 당시의 스케이트는 기술보다는 힘의 스케이트를 중시하였는데 이 대회에 참가한 선수로는 정충구, 조흥식, 이익환 등이었다.

그 후 한국 빙상계는 뚜렷한 간판선수가 없다가 이영하 선수의 출현으로 한국 빙상계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영하 선수는 1976년 1월 17-18일에 개최된 세계 주니어 선수권대회에서 세계 주니어 신기록을 수립하며 종합우승을 차지하는 등 그가 은퇴할 때까지 국제 선수권대회에 여러 번 참가하여 한국 빙상을 세계 속에 새로운 이미지를 부각시켰으며 그가 은퇴할 때까지 수립한 한국신기록은 무려 51회나 된다.

이영하 선수의 뒤를 이어 1987년 네덜란드에서 거행된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한국의 배기태 선수는 500m에서 37초 04로 1위를 차지하며 한국의 새로운 간판 스타로 등장하게 된다. 또한, 배기태 선수는 1990년 2월 노르웨이 트롬소에서 거행된 세계 스프린트 선수권대회에 종합우승을 차지하며 금메달을 획득하여 한국 빙상계의 새로운 신기원을 이룩하였으며 1990년 제2회 동계 아시아 경기대회에서도 10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영광스런 은퇴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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